새벽에 일어나 성무일도 바친 후 ‘묵주기도’와 ‘미사’를 봉헌하려고 수도원 밖을 나섰는데 비가 왔다. 순간, ‘휴 ... 다행이다!’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이 비가 눈이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 !
시간이 되어 공소 식구들과 아침 미사를 봉헌한 후, 수도원 식구들은 각자 오전 일과를 보냈다. 나는 유난히 바쁜 오전 일과였다. 내일 전주 교구청에 가서, 총대리 신부님과 관리국장 신부님을 뵙는 날이라! 이거저것들이 겹쳐 마음까지 바빴다. 내일 전주 교구청을 함께 들어가는 경당의 설계사님과 현장 소장님 또한 나처럼 바빴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그래서 더욱 미안해진다.
점심 먹고, 오후 시간! 책상에 앉아 개갑장터 성지와 복자 최여겸 마티아를 알게 된 후부터 줄곧 마음으로부터 물음표가 생긴 것을 차분히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았다. 그건 바로 ... ‘감옥!’
2018년 8월 31일부터 9월 2일까지 복자수도회에서 ‘청년 순교자 축제’를 개최했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폐회식 미사를 개갑장터 성지에서 봉헌했다. 이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당시 축제 준비위원장을 맡은 나와 동료 형제들은 답사 형식으로 개갑장터 성지를 몇 번을 갔었다. 그럴 때 마다, 꼭 들린 곳이 있었다. 그곳은 바로 ‘복자 최여겸 마티아가 천주교 신앙 때문에 체포되었던 무장 읍성’과 당시 ‘무장 현감’(縣監)이 집무를 했던 ‘동헌’(東軒)이었다. 그 곳에서 무장현감에 의해 최여겸 마티아가 심문을 받았다. 그렇게 현감 앞에서 심문을 받으며 최여겸이 옥살이를 했을 때, 그 있었던 ‘감옥’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무장읍성! 나름대로 잘 복원이 되어 있는 읍성이다. 19세기에 그려진 지도를 보면, 이 지역에는 읍성이 세 군데 있었다. ‘고창읍성’, ‘흥덕읍성’, ‘무장읍성’. 이를 통해 이 지역이 그 당시에는 살만했고, 특히 농사 등이 잘 되어 사람들도 많이 살았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런데 과거의 영화와는 달리 현재 무장읍성은 고창읍성에 비해 초라하고 시골스럽다. 그렇다면 19세기에 잘 살았던 무장읍성이 20세기에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그건 다음에 쓰기로 한다. 단지, 현재 잘 복원된 무장읍성에는 ‘동헌’과 ‘객사’가 중심으로 이루었고, 특히 남문과 해자가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으며, 줄지어 선 오래된 나무들이 무장읍성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복자 최여겸이 1801년 4월, 한산에서 체포된 후, 무장읍성으로 끌려왔다가 전주 감영으로 가지 전까지 잡혀 있었던 곳, 이어서 서울에 있는 형조로 갔다가 이어서 무장읍성으로 다시 끌려왔을 때, 최여겸 마티아가 체포되어 옥살이를 한 ‘감옥’은 과연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당시 고지도를 찾아보았는데, 의외로 너무나 쉽게 찾을 수 있었다. 19세기 무장현의 지도가 있었던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茂長縣圖】, 즉 무장현 지도가 있다. 작자는 당시 공적인 그림을 그리며 살았던 어느 화원(畫員:조선시대에 지도 그리는 일은 대개 화원들의 몫이었다. 또한 왕이나 당시의 유명한 사람의 초상화도 화원들이 그렸다)이 154×112cm 크기의 종이에 전라도 무장현을 정교하게 그린 지도였다. 그 그림에는 읍성과 관아. 산천과 바다, 마을의 모습이 자세히 그려져 있고, 봄꽃도 관찰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기에 보면 아주 희미, 흐릿하게 ‘獄’이라는 글이 있었다. 다시 말해서, 해자를 지나, 정문을 통과하면 바로 왼쪽 부분에 연못이 하나 있는데, 그 연못까지 가기 전 어느 지점이 감옥 자리였다.
무장읍성을 복원하였던 그 위원회에서 복원 당시에 감옥까지 복원을 해 주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러면 더욱 생생하게 복자 최여겸의 마음을 묵상해 볼 수 있었을 텐데. 앞으로 언젠가 - 누군가, 꼭 무장읍성에 있었던 감옥을 원형 그대로 복원해 주신다면, 참 고맙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나 역시, 아주 빠른 시간에 무장읍성에 달려가서, 감옥 자리 앞에서 기도를 바칠 결심을 해 본다.
감옥 자리 앞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순교 직전 - 최여겸 마티아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린다. ... 이승에서 마지막 순간을 보낸 그 날 밤, 1801년 음력 5월 18일 - 길고 긴, 어둡고 힘겨운 시간을 오로지 침묵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보낸 최여겸 마티아 ... 언젠가는 220년이 지난, 오늘에 다시 그 분의 모습을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성모님, 우리 어머니.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순교의 길을 걸었던 최여겸 마티아를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그가 이승에서 보낸 마지막 밤, 그 길고 긴 – 밤 시간을 지낸 옥(獄)을 떠올려봅니다. 아울러 - 비록 범죄자로 취급되어 그의 몸은 묶여 있어도, 마음과 영혼은 하느님의 영원 속 시간을 이미 자유롭게 거닐고 있던 최여겸 마티아의 삶을 묵상해 봅니다. 하지만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 최여겸이 떠난 그 빈 자리에 아무 것도 남겨 놓지 않았지만, - 지금 우리는 그의 빈자리 앞에서 그가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신앙이 무엇이었는지를 성찰해 보려합니다. 우리 기도에 함께 해 주소서, 사랑하올 어머니여.”
오늘따라 최여겸이 체포되어 갇힌 감옥 자리를 떠올려보는데, 감옥 안에 갇혀 있었던 최여겸 마티아가 무척이나 자유롭게 느껴진다. 문득, 묵상 중에 ‘감옥에 갇힌 이가 자유롭게 느껴지는 놀라움’에 마음이 짠 – 이유는 지금 우리에게 복자 최여겸 마티아의 삶은 세상의 모든 것 앞에서 연연해하지 않을 수 있게 해 주는 영적인 힘을 줄 것 같기 때문이다.
신부님을 왜 개갑성지로 보내셨는지 이제야 이유를 알거같아요.앞으로도 좋은정보 부탁드려요.건강하시고 힘내세요.♡♡♡
신부님! 한자 배울때 [옥] 이라는 단어는 죄수들의 짐승소리와 개소리가 난무하는 곳이라고 하던데, 갑자기 이렇게 엄숙하고 성스러운 장소와 겹치면서 실 없는 생각이 떠 오르지요? 아무튼 무장읍성에 옥 자리 복원을 기대합니다.
신부님덕분에 복자 최여겸 마티아 순교자의 신앙과 교회사를 새롭게 만나볼수있게되어 감사드립니다.
하느님께선 개갑장터 성지에 신부님이 꼭 필요로 해서 부르셨나 봅니다.덕분에 복자 최여검 마티아 순교자의 신앙과 교회사를 공부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사 신부님~~
이제 다시 빛을 발 하기 시작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