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다닐 때, 소풍을 가면, 6년 내내 했던 게임 중에 하나가 ‘보물찾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들이 숨겨둔 그 보물들을 나는 – 단 한 번도 찾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혼자 ‘음모론’을 제기한 적도 있었다.
‘평소 선생님들은 수업 시간에 마음에 둔 아이들을 골라 소풍가기 전 날, 몰래 만나서 보물이 적혀 있는 종이를 미리 주었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나만 보물을 찾지 못하기에.’
하지만 ‘음모론’은 무슨 얼어 죽을 음모론! 비록 게임이지만, ‘보물찾기’를 할 때 마다, 마치 실제로 ‘보물’을 찾는 마음으로 간절하고, 절박하게 – 그리고 친구들과 흥미를 가지고, 신나고 재미를 가지고 게임을 해야 뭔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보물찾기’였다.
하지만 나의 어린 시절, 나에게는 그런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소풍 왔다 보다, 밥 먹나 보다, 게임을 하나 보다, 그리고 소풍이 끝나고 집으로 가나 보다 ... ’ 뭐 이런 생각으로 소풍을 갔으니!
그런데 어린 시절에도 흥미를 가져보지 못했던 ‘보물찾기’가 어른이 된 지금에야 그렇게 하고 있다. 특히 지금 이 곳, 공소와 성지에서 살면서! 아니 ‘고창’이라는 이 동네에 살면서, 더 나아가 ‘전라북도’에 살면서! 그러다보니, 비록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은 아니지만, 이곳에서 일상을 살면서 형제들과 함께 신나고 재미있게 살다보니 ... 나도 모르게 뭔가를 발견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 마다, ‘고창’ 이 동네는 참으로 신기한 동네임을 알게 된다.
몇 일 전, 개갑장터 성지 리플렛과 홈페이지 제작을 위한 사진 작업을 위해 서울에서 사진작가 분이 내려왔다. 그래서 고창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만나 점심 식사를 위해 공소로 가는데, 작가 형제님이 말했다.
“신부님, 이 곳의 자연이나 주변의 모든 풍경들이 참 좋아요. 오며, 가며 이러한 모습들을 사진에 잘 담아 두면 좋겠어요.”“예, 맞아요. 제가 거의 2달하고 열 흘 정도를 고창에서 살았는데, 자연 환경은 참 좋아요.”
그렇게 말하며 가는데, 작가 형제님은 고창의 기암괴석 중에 하나인 ‘병바위’를 보더니, 달리는 차에서 ‘병바위’ 사진을 찍으려 했다. 그래서 나는 차를 도로에 잠깐 대었다. 그러자 작가 형제님은 ‘병바위’ 사진을 찍는데, 나는 그 옆으로 깎아지른 절벽 한 가운데에 뭔가가 보였다. ‘어, 저게 뭐지, ... 암자인가, 집인가 ... 무슨 절벽에다 집을 ... ’
그리고 우리는 공소에서 점심을 먹고, 성지로 갔다. 작가 형제님은 혼자 자유롭게 사진을 찍으셨고, 나는 나대로 성지에서 일을 했다. 그렇게 계획했던 일을 마치고 형제님은 가셨고, 또 다시 일상을 사는데. 머릿속에는 암자인지, 집인지 ... 그 뭔가가 계속 생각이 났다.
그래서 어제, 전주 교구청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때마침 그 길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래서 차를 우회전해서 마을로 들어가, 천천히 – 천천히 그 곳을 찾아 나섰다. 어릴 때도 가져보지 못했던, 보물을 찾으려는 마음, 그 재미있고 흥미로운 마음을 간직하며 ...
아주 천천히 차를 운전하며,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거렸다. 그러면서 기암괴석 방향을 찾아 가는데, 절벽 같은 것에 진짜로 뭔가가 보였다. 그래서 그곳을 갔더니, 정자라고 해야 할까, 작은 집이라고 해야 할까. 암튼 멋진 건축물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그 곳으로 가는 곳의 출입문이 잠겨 있어 실제로 갈 수 없었기에 문 앞에서 서서 사진 한 컷을 찍은 후, 수도원에 돌아와 검색했다. 그래서 찾아보니, ‘두암초당’(斗巖草堂)이라는 명칭의 ‘초당’이었다. ‘초당’이라는 말은 사전에서 ‘집의 본채에서 따로 떨어진 곳에 억새, 짚 등으로 지붕을 이어 만든 작은 집’이라고 설명해 놓았다.
그리고 ‘두암초당’은 아산초등학교(내가 차를 세운 곳이 아산 초등학교였구나!) - 뒤 절벽 중턱에 지어진 두 평 정도 되는 건물로 16세기, 조선 시대 유학자 하서 김인후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퇴계 이황과 교류하였던 호암(壺巖) 변성온(卞成溫 1530~1614)과 그의 동생 인천(仁川) 변성진(卞成振 1549~1623) 변성진 형제가 만년에 머물렀던 곳이라고 한다. 목조 건물로 지어져, 잦은 훼손으로 인해 후손들이 다시 짓곤 했지만, 또 무너지고, 헐고 ... 그래서 지금의 정자는 1954년에 지은 것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절벽 아래, 그래도 높고 – 또한 외딴 곳에 초당을 지어 살았던 두 형제의 노년의 삶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특히, ‘두암초당’에서 ‘두암’이라는 이름은 ‘곡식을 되는 말(斗)이나, 저울추같이 평평하여 모자라지도 치우치지도 않는 삶’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삶 속에 치우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평평한 ‘되’나 ‘추’를 가지고 사는 삶이라 ...
당시 유학자들의 삶과 정신 세계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생각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마치, 나만 알고 있는(=실은 다 알고 있지만 ... 하하하) 보물을 찾는 그런 느낌 또한 들었다.
고창에서 나의 제1호 보물을 그렇게 찾았다. 신나서 랄라라 ...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그런삶을 추구하며 오늘하루 시작해봅니다 오늘도 신부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일에 주님 함께해주시리라 믿습니다
ㅎㅎ
신부님 축하드려요
저도 오늘 보물을 찾았거든요^^
그길인줄알고 들어섰는데
기다렸는데 아니였어요 ㅠㅠ
요정의 도움받아서
길을찾았어요
기뻤어요^^
학자 신부님답게 유학자들이 기거하셨던 '두암초당'이 고창에서의 보물 1호가 되었네요. 보물찾기에 성공하심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