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지역에 있는 우리 수도회에서 선배 신부님 한 분과 후배 수사님 두 분, 이렇게 세 사람이 ‘고창 수도원 나들이’를 하셨다. 28일 점심 때 심원 공소에 도착했는데, 선배 신부님의 한 말씀!
“야, 우리가 폭설을 뚫고 왔다, 폭설을.”
그런데 재미있는 건, 수도권 지역에서 부터 폭설은 뚫고 오신 듯한데, 고창에서는 지금 폭설이 내리려고 하늘이 어둡다가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우리 수사님 일행은 폭설을 뚫고 고창을 온 것이 아니라, 폭설을 그대로 몰고 오신 것이 되었다.
나를 포함해서 일행 다섯 명은 점심 식사를 하러 근처에 위치한 ‘구시포 해수욕장’, 해안 길에 있는 ‘백합 칼국수’ 집에 갔다. 코로나19 방역 지침에 따라 우리는 세 명, 두 명 이렇게 나뉘어서 자리를 앉았다. 거기서 ‘백합 칼국수’를 먹고, 남은 국물에 밥을 말아 먹었다. 나는 선배 신부님과 후배 신부님, 이렇게 세 사람이 함께 앉아 식사를 했는데, 칼국수를 다 먹고 국물에 밥을 말고자 했다.
‘뭐, 자연스럽게, 사람이 세 사람이라 공기 밥 3그릇을 시키면 될 터인데 ... ’
선배 신부님은 굳이 두 그릇을 시키자고 우기셨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두 그릇을 시켰는데, 뜨거운 백합 칼국수 국물에 밥을 말아 놓고 보니 – 선배 신부님 눈에는 맛있게 보였나 보다. 그래서 안 먹을 것처럼 하신 선배 신부님도 밥을 함께 먹는 바람에 ... ! 식사를 다 마치고 식당을 나오는데 왠지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점심을 먹은 것도 아니고, 안 먹은 것도 아니고.
나는 마음속으로 계속 궁시렁, 궁시렁한 것 같았다. ‘아니, 사람이 세 사람이면, 공기 밥 세 그릇을 시켜 밥을 말면 충분할 터인데, 굳이 두 그릇만 시키자고 하니, 그 이유를 알다가도 모르겠네. 그리고 안 먹을 것처럼 하면 안 먹어야 하는데, 어찌 그리 잘 드셨을까!’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한 척, 선배 신부님에게 물었습니다.
“맛있게 잘 드셨어요?”
“어휴, 너무나 배부르게 잘 먹었어요. 고마워요.”
그 말을 듣고 있는 밥값까지 계산한 나의 표정은 ... 웃는 게 웃는게 아닌 듯 했다, 하하하. 마음 속, 쪼잔한 감정은 구시포 해수욕장, 그 파도에 던져버렸다.
우리는 복자 최여겸 마티아가 체포되어 잡혀 있었던 무장읍성을 먼저 돌아본 후, 개갑장터 성지로 갔다. 눈발은 점차 심해지더니, 바람마저 모질게 불었다. 성지에 내리자, 나는 사무실로 가서 차를 준비했고, 다른 형제들은 눈바람을 맞으며 순례를 했다. 그렇게 순례를 마치고 들어오는데, 선배 신부님 표정이 화가 나 있다.
“강 신부. 십자가의 길 하는 도중에 ‘복자 최여겸 참수터’가 있더라. 그리고 그 뒤로 길이 나있고, 큰 봉분의 무덤이 있었어. 그래서 그 무덤이 복자 최여겸의 묘지인가 싶어, 참배하려고 가 봤더니, 아니잖아. 그게 어떻게 된 거야?”
“모르겠어요. 어느 집안에서 가족 납골당을 그 곳에 조성한 모양인데, 제가 여기 왔을 때 이미 다 되어 있었어요.” “야, 나도 거기가 복자 최여겸의 묘지라고 생각했는데, 일반 순례자들이 거기를 보면, 오죽 하겠어? 계획적인 것도 아니고 ... 어떻게 조처를 취해야 할 것 같은데.”
“예. 우선 마구간 경당을 먼저 한 후에 그 문제는 관계 인사 분들과 논의를 해 보려구요.”
형제들 모두가 개갑장터 성지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보면서 마음이 흐뭇했다. 추운 겨울, 창밖으로 점차 더 굵어진 눈발이 휘날렸지만, 형제들이 형제들의 사도직에 깊은 관심을 보여주는 모습에 마음은 더 따뜻해졌다.
차를 마시고, 우리는 다시 개갑장터 성지에서 8km 정도 떨어진 영광 법성포로 향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고창 지역은 전라북도와 전라남도의 경계이고, 개갑장터 성지는 전주 교구와 광주 교구의 경계였다. 그래서 복자 최여겸 어르신께서 1790년대 당시 선교 활동을 하실 때 전북 지역 뿐 아니라, 전남 영광과 함평 지역까지 넘나들었음을 사료를 통해 살펴볼 때, 결국 최여겸 어르신이 광주 교구에 복음의 씨앗을 전파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내 머릿속 계획은 영광 시내에 있는 ‘영광 순교자 기념 성당’을 가고 싶었으나, 코로나19로 기념관 문이 닫혀 있고, 눈이 너무 내려서 너무 멀리가려는 계획을 바꾸었다. 그래서 영광 법성포에서 근처 영광 대교를 지나, ‘백수 해안도로’를 드라이브했다. 눈 내리는 겨울바다도 정말 좋았지만, 눈이 쏟아지는 바다 저 멀리서 해가 지려는 모습 또한 장관이었다. 하느님은 – 우리의 하느님은 – 정말 예술가임이 틀림없다.
바람이 점점 더, 세차게 몰아쳤지만, 차 안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형제들의 모습을 감상하는 것도 소중하고 중요한 기쁨이었다. 정말이지 ...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형제들이 내 옆에 있다는 것은 삶의 큰 행복임이 틀림없다. 저녁 시간이 되어, 심원 공소로 돌아와 형제들과 함께 수도원 식당에서 조촐하면서 행복한 식사를 했다. 또한 공소 내 수도원에는 손님방이 없어 형제들이 머물기에는 불편하지만,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형제들이 함께 잠을 청하는 모습을 보면서 ... 그저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