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16일, 한국을 방한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로 순교한 분들 중에 124분을 복자로 시복하였다.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시성식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 한국의 순교자 103분을 성인으로 시성한 후, 20년 후에 124분의 복자가 탄생된 것이다.
그 중에 한 분, 전라도 무장 출신('양반'이라고도 하고, '양인'이라고도 함/올 8월 30일, 복자 최여겸 심포지엄에서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을까 기대해 봄) 최여겸(崔汝謙, 마티아. 1763-1801) 어르신이 포함되어 있다.
복자 최여겸에 관한 기록에 보면 '그는 어려서부터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막연히 듣고, 그것에 대해 알기를 매우 원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에서 1784년에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생겨났고, 그 후 여러 종류의 천주교에 관한 교리서와 기도서가 필사되어 전국적으로 배포되었음을 감안한다면, 복자 최여겸이 천주교를 알게 된 것은 21세 이후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어려서부터'라는 말이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조선 시대에서 남자의 나이가 21세라면, 15-17세 부터 성인으로 결혼할 나이였음을 감안해 볼 때, 결코 어린 나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21세의 나이라면 다 큰 청년인데! 아마도 복자 최여겸에 대한 기록을 남긴 분(다블뤼 주교님!)께서 '어려서'라는 말을 좀 더 강조하고 싶었을 것으로 본다.
아무튼 복자 최여겸은 '25세 때인 1788년(정조12년)에 복자 윤지충(바오로, 1791년 순교)와 전라도의 사도라고 불리는 복자 유항검(아우구스티노, 1801년 순교)을 찾아가 본격적으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고 한다.
그 후 복자 최여겸은 충청도의 한산으로 장가를 갔고, 거기서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는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을 만나 천주교 교리를 배우면서 신앙심이 더욱 공고해졌다.
당시 복자 최여겸의 처가가 한산에 있었는데, 이존창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은 '우연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 예고된 우연'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내포' 지역에서 천주교 신앙 공동체를 이끌던 양인이자, 농부이면서, 학자라 칭했던 이존창의 모습에 복자 최여겸은 큰 감동을 받았을 것이라 혼자 묵상해 본다.
복자 최여겸은 처가살이를 마치고 고향 무장으로 돌아와 천주교 신앙인으로서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고, 그 뿐만 아니라 천주교 교리를 주변에 전파하였다. 복자 최여겸은 자기가 받은 신앙의 은총을 전해 주기 위한 열성이 뜨거웠고, 천주교 신자로서 신심이 대단하여 무장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을 천주교 신자로 입교시켰던 것이다.
무장 지역을 중심으로 복자 최여겸 마티아로 부터 천주교 신앙을 전해 받은 이들이 흥덕, 함평, 영광 ... 등에 있었다는 기록을 볼 때, 복자 최여겸은 당시 호남 지역의 중요한 선교사로서 활동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의 마을 형성은 씨족이나 친족 중심의 혈연 공동체였음을 감안할 때, 그리고 지역 간 이동은 자유롭지 못해 어려웠고, 다른 지역 사람에 대한 배타적인 감정이 컸던 풍조를 생각해 보면! 심지어 모르는 사람이 자신들의 마을에 들어왔을 경우 그 사람에게 위해와 위협, 폭력적인 행위를 가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선교 활동은 무척 힘들고 어려움이 컸으리라 생각해 본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오로지 마음 속에 하느님만 생각하고, 하느님만을 가슴에 품으며, 천주교 신앙으로 살고자 노력했던 복자 최여겸의 선교 활동을 생각해 보면 ... '복자 최여겸에게 진정 하느님이 어떤 분이셨기에 자신의 전부를 내어 던질 수 있었을까?'를 묵상해 볼 수 있다.
"복자 최여겸 마티아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