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해,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교회는 희년을 선포하였다. 또한 유네스코에서도 김대건 신부님을 세계 기념 인물로 선정했다. 큰 경사임은 틀림이 없다. 그래서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희년의 주제를 "당신이 천주교인이오?"로 정했다.
이 문구는 1846년 8월 26일, 김대건 신부님이 페레올 주교님에게 쓴 20번째 옥중 서한에 담긴 문구이다. 이 문구의 배경은 김대건 신부님이 체포되었을 때, 관장이 김대건 신부님에게 물었던 물음이었다. "당신이 천주교인이오?" 이에 김대건 신부님은 망설임 없이 대답하였다.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
그렇다면 김대건 신부님이 탄생하기 20년 전으로 돌아가 본다.
때는 1801년(순조1년) 정월. 조선 정부에서 공식적인 박해령으로 인해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일어나자, 최여겸은 처가가 있는 ‘한산’ 지역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당시 최여겸의 활동 내용이나 활동 범위로 볼 때 '요주의 인물'이었기에 발각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최여겸은 4월 '한산' 지역에서 포졸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체포된 최여겸은 오랏줄로 묶인 채 ‘한산’ 관아로 끌려가 본관(本官) 앞에서 심한 고문을 받았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복자 최여겸이 받은 형벌 중에 ‘주리틀기’를 잔인하게 당하여, 주리를 틀던 몽둥이들이 부러져나갔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자 최여겸은 결코 굴복하지 않자 '한산' 관장은 최여겸에 관한 모든 내용을 감사(監司)에게 보고했고, 감사는 복자 최여겸을 ‘무장’(茂長) 본관에게 압송(押送)시켰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무장읍성에 끌려간 최여겸은 무장현감 앞에서도 고문을 당했다. 그런데 거기서도 최여겸은 용감하게 고통을 참아 받았다.
최여겸이 전혀 배교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무장현감은 음력 4월 19일, 전라도 감영(監營)이 있는 ‘전주’로 이송시켰다.
전주 감영에서 최여겸의 재판이 진행되었다. 이때에 재판관은 무장에서 끌려온 최여겸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사학(邪學)을 따르느냐?”
이 물음에 최여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저는 유일한 참 종교를 따릅니다.”
조선 정부는 조선 후기 사회에서 양반 뿐 아니라 양인, 그리고 천인, 심지어 백정들에게 까지 전파된 천주교 신앙에 대해서 한낱 그릇된 학문, 혹은 이단 사설 등으로 치부했었다. 그래서 조선 정부의 관리들은 그릇된 학문에 물든 '천주학쟁이'들을 올바른 길(성리학의 가르침)로 돌아가게 하려는 마음으로 고문을 하고 심문을 했다.
그러한 천주교 신앙에 대한 탄압 배경에는 조선 정부의 관리들에게 조선이라는 나라는 어진 임금이 다스리고 있는 '태평성대의 나라'였던 것이다. 그래서 천주학쟁이들은 임금의 특은에 힘입어 지난 날 잘못된 길을 갔던 것을 뉘우치고, 그릇된 가르침을 끊고 '배교'하여 정학의 삶으로 다시금 돌아오라고 강요하였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복자 최여겸은 전주 감영에서 재판관에게 '천주교'는 그릇된 학문이 아니라, 유일한 참 종교라고 고백한 것이다.
"저는 유일한 참 종교를 따릅니다."
종교! 모든 가르침에 있어서 근본이 되는 것.
복자 최여겸은 자신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으뜸이 되는 것을 천주교 신앙이라 생각했기에, 그는 천주교 신앙만이 참된 종교라 고백할 수 있었다.
나는 이 모습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면 할 수록 ...
김대건 신부님보다 20년 먼저 천주교 신앙의 가치를 고백한 분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분이 마지막 순간, 하느님에 대한 믿음, 희망, 사랑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곳에
지금 - 이 - 순간 - 발을 내딛고 있다는 것에 큰 기쁨을 느낀다.
"복자 최여겸 마티아여, 당신이 고백한 천주교 신앙에 대한 확신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전해 질 수 있도록 우리를 하느님 사랑의 길로 이끌어 주시고 간구해 주소서. 아멘'
끌려가는 최여겸의 몸둥아리와 얼굴을 보고 그 나무들은 닮고 싶었을까 아니면, 그 때 보았던 모습을 먼 훗날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었을까 ? 얼핏 그분의 얼굴이 비친다. 숙연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