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최여겸에게는 팔순의 노모(老母)가 있었다. 그래서 최여겸은 옥살이 중에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천주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세상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죽음을 받아들일 결심을 했지만, 단 한 가지! 죽기 전에 어머니 얼굴을 단 한 번 만이라도 뵐 수만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고 전주 감영 재판관에게 말했다. 하지만 재판관은 그것 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최여겸은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지만, 밝은 마음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최여겸은 자신을 매질로 죽이기로 되어 있다 말하는 소리를 듣고 며칠 동안 슬픔에 잠겨있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최여겸은 서울 ‘포도청’과 ‘형조’로 압송되었고, 그 과정에서 배교(背敎)를 강요당하며 심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최여겸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신앙을 지켰다. .
“십계명을 버릴 수 없고 죽음을 택하겠다.”
최여겸은 포도청에서 충실한 신앙의 증거자인 한정흠(스타니슬라오. 2014년에 복자로 시복)과 김천애(안드레아. 2014년에 복자로 시복)를 만나게 되니 세 사람은 서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마침내 형조에서 1801년 음력 7월 13일에 ‘해읍정법’(該邑正法)의 명을 내렸다. '해읍정법'이라 함은 ‘죄인이 본래 살았던 거주 지역에서 공식적인 형벌을 집행하라'는 뜻이다. 이에 따라 최여겸은 또 다시 서울에서 고향 땅 ‘무장’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그 고을에서 시장이 열렸던 지역인 ‘개갑’에서 음력 7월 19일에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하느님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버릴 수 있었지만, 그래도 어머니 얼굴 한 번 뵙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었던 최여겸!
우리는 기도할 때 마다 하느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얼마나 마음 속으로 혹은 겉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투덜거렸는데 ... 최여겸은 어머니 얼굴 한 번 보고 싶은 그 소원이 거절되어도 오히려 더 하느님 안에서 고요히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포도청에서 옥살이를 하는 동안 같은 천주교 신자를 만나서 행복을 나누었던 최여겸!
살아가는 동안 내 자신이 당당하게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 조차 어색해 하고, 간단한 예로 식사 전후 기도를 바치는 것 조차 누군가 볼까봐 때로는 어색해하고, 평소 나와 가까운 사람이 아닐 경우 내 주변 사람이 천주교 신자이건 아니건 나와 무슨 상관이야 하며 지냈는데 ... 최여겸은 죽음의 고통 앞에서도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동료 신자를 만나자마자 기뻐하며 하느님께 온전히 찬미와 영광을 드렸습니다.
한산에서 무장, 무장에서 전주, 전주에서 서울, 서울에서 다시 무장으로 - 천주교 신앙 때문에 끌려 다니면서도 그 모든 여정을 하느님께만 의탁했던 최여겸!
미사 드리러 성당에 갈 때면 일찍 성당에 가서 감실 앞에 머물면서 기도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 본당 미사 시간이 10시면 그저 10시에 집에서 출발해서 '헌금 좀 해 주고 성체만 모시고 싶은 마음'에 성당에 가려고 하고, ... 때론 아무리 성당이 가까워도 차를 가지고 편안하게 가려고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고, ... 성당이 조금 멀다는 이유로 단지 주일 한 번 지키는 것도 힘들어서 한 달에 한 번만 성당 가야지, 각 분기에 한 번 성당 가야지, 혹은 부활절과 성탄절에만 성당 가야지 ... 그러다가 점점 더 하느님과 멀리하며 지냈는데 ... 최여겸은 결박된 채 불편하게 수 백 킬로미터를 끌려 다니면서도 배교의 유혹을 과감히 뿌리치고 묵묵히 ... 자신의 길이 주님에 대한 신앙의 길이라 생각하며 ... 그렇게 걷고 또 걸었습니다.
자신이 자랐던 마을의 장날에 조리돌림을 당한 후 목이 잘리는 참수형을 받아 하느님 품으로 갔던 최여겸!
일상 안에서 누군가가 나의 약점을 말하거나, 숨겨 놓은 내 상처를 건드리거나, 마음 속 아픔을 끄집어 내거나, 심지어 나의 부끄러움을 드러내려고 하면 그 사람들에게 이유 없이 화를 내고, 짜증을 내고, 부딪히고, 싸웠는데 ... 최여겸은 자신이 살았던 동네에서 이웃 어른들, 동네 아낙네들, 친구들, 그 친구들의 자녀들, 그 밖에 최여겸을 잘 아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 헤어지고 찢어진 옷 뒤로 북을 맨 채, 포졸들이 치는 북소리에 힘겨운 발걸음, 발걸음을 걸으며 ... 온전히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들 내어 맡기 그 모습이 ... 지금도 우리 모두의 마음을 아련하게 합니다.
39세의 나이에 순교의 길을 걸었던 최여겸 마티아가 보여준 신앙의 길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앙 안에서 가져야 할 삶의 자세를 배우게 됩니다.
그건 바로 좋은 마음을 가지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건 바로 박해자에 대한 용서의 마음입니다. 그건 바로 내가 가진 신앙에 대한 확신이며, 하느님에 대한 굳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 그건 사랑입니다.
"주님, 내 비록 부족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복자 최여겸이 보여준 좋은 마음, 용서, 신앙, 믿음 그리고 당신에 대한 사랑의 삶을 충실히 배우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과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